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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꺼내기

돌과 스펀지

by 페펭 2023.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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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대학원 수업에서 있었던 일이다.

 

교수님께서는 수업에 앞서 자신의 페르소나, 즉 현실의 나 말고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을 하나 상상해 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몇 명씩 지목을 하여 발표를 하게 하셨는데,

누군가는 용맹한 사자, 누군가는 넓은 바다 등 다양한 모습과 그에 걸맞은 이유들이 나왔다.

 

내가 생각한 나의 페르소나는 '돌'이었다.

돌처럼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는 건 아니고 돌이 가진 특성 때문에 그랬다.

 

일을 하다 보면 쉽고 원만하게 내 뜻대로 해결되는 것이 별로 없다.

늘 누군가와 부딪치고 싫은 소리를 해야 하고, 또 싫은 소리를 들어야 한다.

논리적으로 말을 해도 논리가 통하지 않는 상대라면 많은 참을성이 필요했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지만 무서워서 다 내려놓고 도망가고 싶었던 적이 너무 많았다.

일이 계속 꼬일 때, 내일은 더 힘들 것 같을 때 마음이 너무 부담되어서 자꾸 무너져 내리려고 했다.

내가 생각한 나는 너무 약했다.

나도 사자나 독수리처럼 맹수를 떠올릴 수도 있었지만, 포식자는 또 다른 포식자에게 먹힐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그 어떤 충격과 부하에도 절대 부서지지 않고 버티는 단단한 돌이었다.

(물로 쇠나 티타늄 같은 돌보다 더 단단한 것도 있었지만 모두 자연에 있는 것을 얘기하길래 나도 그냥 자연에 있는 것 중에 가장 단단한 것으로 골랐다..)

 

그런데 내가 그 생각을 하는 도중에 나와 같은 생각을 하셨지만 나와 다른 답을 내린 한 분이 발표를 하고 계셨다.

 

그분도 늘 누군가과 부딪치고 참을 일이 많고 어려운 일이 많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너무 힘들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은 외부의 압력을 유연하게 흡수할 수 있는 스펀지가 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난 그때 거의 처음으로 누가 하는 말을 듣고 곧바로 내가 틀렸구나 생각했다.

일말의 고집도 없이 내가 잘못생각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며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리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버티려고 했고, 그분은 수용하려고 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방어적이고 갇힌 사고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누군가와 부딪칠 때, 어려운 일과 마주할 때

늘 그것을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기지 못하면 나를 잡아먹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기거나 지거나 둘 중 하나였는데, 지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논쟁에서 지거나 일에서 결과가 잘못되었을 때 며칠, 몇 달을 우울감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했던 적도 있다.

전혀 수용하는 법을 알지도 못했다.

 

누군가는 너무 뻔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분이 하는 말을 듣고 꽤 충격을 받았다.

전혀 다른 돌과 스펀지.

부서지지 않는 돌과 모든 걸 수용하는 스펀지.

사소한 생각 하나였지만 그 생각이 내가 근래에 해본 생각 중 가장 충격적인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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