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면 나는 어릴 때부터 남들보다 늦었다.
항상 뒤늦게 먼저 앞서간 이들을 바라보며 아쉬워하고 그리워했다.
사춘기
중학교 시절 친구들이 사춘기가 한창 와서 얼굴에는 여드름이 나고 반항기가 늘어날 무렵
나는 대체 그 사춘기나 질풍노도의 시기가 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변성기가 뭔지 잘 몰랐다.
그래서 잠시나마 어른스러움으로 느껴졌던 그들의 쉬어버린 목소리가, 얼굴에 핀 여드름이 부럽기도 했다.
남들이 사춘기를 다 넘겨가고 있을 무렵, 고2, 고3 때 나의 사춘기가 왔다.
친구들이 겨우 사춘기를 넘기고 하나 둘 미래를 정해갈 무렵
난 공부가 과연 인생에서 중요한 것인가, 대학을 꼭 가야 하는가, 세상이 이렇게 부당하구나 하며 사춘기를 만끽했다.
혼자 느끼던 사춘기는 외로웠다.
대학
난 대학도 늦었다. 두 번 늦었다.
고등학교 친구들은 연락이 끊겼고, 새로운 재수생 친구들이 생겼다.
이번엔 늦었지만 함께 늦은 친구들이 있어서 그래도 많이 외롭지 않았다.
재수가 끝나고 다들 대학교에 가서 나도 점수에 맞춰 대학교에 갔다.
거기서 또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다. 난 다시 늦은 사람이 되었다.
한 학기가 지난 뒤 자퇴를 하고 반수를 시작했다.
이 때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너무나 외로웠고,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면 부러우면서도 너무 반갑고 참 고마웠다.
군대
남들보다 대학 진학이 2년 늦어져서, 군대는 조금 서둘렀지만 그래도 늦었다.
대학교 1학년이 끝난 뒤 겨울, 23살의 나이에 입대를 했다.
여기선 내가 늦은 게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나이는 중요하지 않은 곳이었다.
계급 속에서 처음으로 빠르고 늦은 것은 상대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신 나보다 빨리 온 사람들이 빨리 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과거의 나를 조금 원망했다.
그때 남들과 발을 맞췄다면 나도 지금 나갔을 텐데, 더 일찍 바깥세상을 느낄 수 있었을 텐데.
24살이 끝나갈 무렵 전역을 했고, 또 늦을까 봐 부리나케 복학신청을 해서 25살이 되며 대학교 2학년이 되었다.
사랑
사랑도 참 늦었다. 25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진짜 누군가를 사랑해 보았다.
늦은 사랑을 보상하려는 듯이 매일 같이 그녀를 만나고 많은 것을 공유했다.
늦은 첫사랑은 그렇게 보고 싶던 친구도 잊게 만들었다.
우리는 참 잘 어울렸고, 나는 참 식상하게도 그녀에게 내 심장을 내어줄 수 있었다.
늘 늦됨을 의식하며 살았던 나는 처음으로 나의 늦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땐 생각하지 못했고, 알지도 못했다.
이별
늦은 만큼 강렬했던 사랑은 그 뒤에 오는 아픔도 너무 혹독했다.
영원히 함께 할 줄 알았던 그녀는 남이 되어버렸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모든 것이 늦었던 내 인생에 하필 그녀와의 만남만큼은 너무 빨랐던 게 아닐까, 지금도 생각한다.
나에게만 이런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할 때 즈음,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다들 한 번씩 겪어본 아픈 사랑임을 알게 되었다.
난 역시 또 늦고 있었다.
취업
아마 이때의 늦음이 나에게 가장 불안했던 시기가 아닐까 싶다.
하나 둘 이제 사회로 나아가 더 이상 학생이 아닌 사회인으로서 제 몫을 하고 있을 때,
난 방에 틀어박혀, 카페 한 구석에 앉아서 이력서를 썼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준비 과정으로 느껴졌다.
내가 과연 저들처럼 좋은 직장에 취업을 해서 일을 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그러다가 어쩌면 꽤 급하게, 다시 생각해 봐도 성급하게 한 회사에 취업을 했다.
결혼
직장 생활을 한지 몇 년 지나며 결혼을 하는 친구들이 생겼다.
그들이 결혼할 사람과 인생의 기로에서 함께 할 방향을 선택을 하고 있을 때,
난 또 그 시절의 사춘기처럼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홀로 멀뚱히 서있었다.
난 지금의 내가 좋았고, 결혼은 내 삶을 더 불안하게 만들 뿐이었다.
회사에서 일하고, 친구들과 만나서 놀고, 혼자 카페에서 책을 보는 삶이 좋았다.
그렇게 친하던 친구들이 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겨서 가정을 책임져서 사라졌을 때,
난 또 내가 늦어버렸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나는 어릴 때부터 남들보다 늦었다.
그때도 오늘도 또 뒤늦게 그들을 바라보며, 나를 바라보며 아쉬움과 그리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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